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범부채

포토 에세이

by 흙둔지 2024. 8. 16. 05:15

본문

 

 

대부분 꽃들은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거나 낙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범부채는 한결같이 자태가 늠름하다.
날카롭고 납작한 칼을 닮은 잎들은 활짝 펼쳐 보이면서
꽃줄기는 똑바르게 치고 올라와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을 펼쳐보인다. 
또 다른 꽃들과는 달리 비가 아무리 내려도 자태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강렬한 꽃과 시원한 잎사귀를 동시에 묘사하는 범부채라는 이름까지 여름과 어울린다.

​대부분 여름꽃들은 세찬 빗줄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특히 곤충을 기다리는 꽃들에게는 더더욱 싫은 순간이다.
사방을 향해 피어야 할 댕강나무의 종 모양 꽃들은 
쏟아지는 빗방울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점점이 노란빛으로 나무를 장식해야 할 모감주나무의 꽃들은 
비를 맞자마자 떨어져 땅바닥을 노랗게 장식해 버린다. 
그러니 비는 여름꽃들에게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다.

범부채를 정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 강렬한 꽃을 보고 외국에서 온 식물이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상외로 범부채는 한국 자생식물이다.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걸쳐 피어난다. 
꽃이 화려해도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범부채의 고상한 모습은 매력적이어서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 관상용으로 소개됐다.

​범부채의 드러난 매력에 가려진 숨은 비밀이 있다. 
활짝 핀 범부채 주변을 살펴보면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짜 꽃봉오리고 다른 하나는 꽃이 진 모습이다. 
꽃이 피기 전과 꽃이 진 후가 모두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이유는 
꽃이 진 모습이 너무도 단정하기 때문이다. 

진짜 꽃봉오리는 작은 꽃잎을 겹겹이 포갠 모양새고, 
꽃이 진 모습은 정교하게 회오리처럼 감아놓은 모양새다. 
회오리, 즉 나선상 배열은 꽃이 가진 중요한 규칙 중 하나다. 
하나의 중심에 여러 꽃잎이 붙어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피보나치수열! 
술패랭이나 나팔꽃처럼 많은 꽃이 꽃봉오리일 때 꽃잎이 회오리처럼 감겨 있다. 
그러다 서서히 역방향으로 풀어지며 꽃을 피운다. 

그러나 범부채는 포개진 꽃잎이 그대로 내려와 펼쳐지는 담백한 개화의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꽃이 질 때 꼼꼼한 꽃잎의 정돈에서 나선형을 관찰할 수 있다. 
대개 꽃들은 비장한 준비와 달리 꽃이 질 때 꽃잎들을 슬프게 허물어뜨린다. 
꽃이 지는데 더 이상의 수고는 무의미하지 않냐며 험하게 덤벼드는 꼴이다. 
그래서인지 범부채의 단정한 끝맺음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위와 습기에 늘어지고 지쳐 단정치 못하기 쉬운 여름, 
범부채의 단정한 자태는 늘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진정 범부채는 한여름 꽃중에 꽃이 아닐까 한다.

 

'포토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잠풀  (22) 2024.08.21
고마움  (19) 2024.08.19
서서히 가을은 다가오고 있다...  (22) 2024.08.13
염원, 기도, 갈망  (25) 2024.08.06
절정의 여름  (20) 2024.08.0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