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꽃들은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거나 낙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범부채는 한결같이 자태가 늠름하다. 날카롭고 납작한 칼을 닮은 잎들은 활짝 펼쳐 보이면서 꽃줄기는 똑바르게 치고 올라와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을 펼쳐보인다. 또 다른 꽃들과는 달리 비가 아무리 내려도 자태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강렬한 꽃과 시원한 잎사귀를 동시에 묘사하는 범부채라는 이름까지 여름과 어울린다.
대부분 여름꽃들은 세찬 빗줄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특히 곤충을 기다리는 꽃들에게는 더더욱 싫은 순간이다. 사방을 향해 피어야 할 댕강나무의 종 모양 꽃들은 쏟아지는 빗방울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점점이 노란빛으로 나무를 장식해야 할 모감주나무의 꽃들은 비를 맞자마자 떨어져 땅바닥을 노랗게 장식해 버린다. 그러니 비는 여름꽃들에게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다.
범부채를 정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 강렬한 꽃을 보고 외국에서 온 식물이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상외로 범부채는 한국 자생식물이다.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걸쳐 피어난다. 꽃이 화려해도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범부채의 고상한 모습은 매력적이어서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 관상용으로 소개됐다.
범부채의 드러난 매력에 가려진 숨은 비밀이 있다. 활짝 핀 범부채 주변을 살펴보면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짜 꽃봉오리고 다른 하나는 꽃이 진 모습이다. 꽃이 피기 전과 꽃이 진 후가 모두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이유는 꽃이 진 모습이 너무도 단정하기 때문이다. 진짜 꽃봉오리는 작은 꽃잎을 겹겹이 포갠 모양새고, 꽃이 진 모습은 정교하게 회오리처럼 감아놓은 모양새다. 회오리, 즉 나선상 배열은 꽃이 가진 중요한 규칙 중 하나다. 하나의 중심에 여러 꽃잎이 붙어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피보나치수열! 술패랭이나 나팔꽃처럼 많은 꽃이 꽃봉오리일 때 꽃잎이 회오리처럼 감겨 있다. 그러다 서서히 역방향으로 풀어지며 꽃을 피운다. 그러나 범부채는 포개진 꽃잎이 그대로 내려와 펼쳐지는 담백한 개화의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꽃이 질 때 꼼꼼한 꽃잎의 정돈에서 나선형을 관찰할 수 있다. 대개 꽃들은 비장한 준비와 달리 꽃이 질 때 꽃잎들을 슬프게 허물어뜨린다. 꽃이 지는데 더 이상의 수고는 무의미하지 않냐며 험하게 덤벼드는 꼴이다. 그래서인지 범부채의 단정한 끝맺음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위와 습기에 늘어지고 지쳐 단정치 못하기 쉬운 여름, 범부채의 단정한 자태는 늘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진정 범부채는 한여름 꽃중에 꽃이 아닐까 한다.